AI는 숙련을 상품화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포를 느낀다.
보통 창업자들은 최근 10~20년의 기술 비즈니스만 보면서 “SaaS는 죽었다”, “프로그래머는 끝났다” 같은 식의 유한 게임적 결론을 내리는데, Pete Flint는 이건 문화사·예술사·미디어사의 훨씬 더 긴 흐름을 놓친 해석이라고 봅니다. Pete Flint는 전자음악이 음악을 끝내지 않았고, 사진이 회화를 죽이지 않았고, 더 강한 AI 체스 엔진이 체스를 끝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분야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갈라지고 커지고 새로운 하위 장르를 낳으며 더 큰 생태계가 됩니다. 그는 이걸 “infinite game” 이라고 부릅니다.
즉 단기적으로는 어떤 역할이나 기술이 덜 중요해질 수 있고, 어떤 비즈니스 창은 닫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진짜 변혁적 기술은 “가능한 것의 범위” 를 넓혀버립니다. 가능성이 넓어지면 사람들이 새 시도를 하고, 새 시도는 새로운 수요를 만들고, 그 수요는 이전에는 없던 시장·직업·산업을 낳습니다. 이게 Pete Flint가 말하는 AI의 본질입니다. AI는 기존 노동을 조금 줄이는 도구를 넘어서, 새로운 경제 표면적(surface area) 을 여는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기술 충격은 대체보다 확장을 만들어왔다. 사진은 회화를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양쪽 모두를 확장했다.
1839년 다게레오타입이 공개됐을 때, 초상화 화가들은 당연히 위협을 느꼈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짧은 시간 안에 높은 충실도로 재현하는 기계가 등장했으니, 초상화라는 주요 생계 기반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때 “회화는 죽었다”는 식의 반응이 나왔고, 실제로 그런 정서가 널리 퍼졌습니다.
하지만 Pete Flint가 강조하는 건, 사진이 회화를 죽인 게 아니라 회화가 더 이상 “현실의 기록”만 담당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의무가 약해지자 오히려 회화는 자유로워졌고, 그 결과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같은 새로운 방향이 폭발적으로 나왔습니다. 즉 사진은 회화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회화를 표현의 다른 차원으로 밀어 올린 기술이었습니다.
AI가 특정 기능을 너무 잘하게 되면, 인간은 그 기능을 계속 붙들기보다 그 위에서 더 자유롭고 더 표현적인 방향으로 이동하게 된다.
사진이 회화를 살려줬다는 것만이 아니라, 사진 자체도 그 후 엄청난 파생 산업과 표현 방식을 낳았다는 겁니다. 다게레오타입 이후 칼로타입, 대량 인쇄, 정부와 출판사의 고용, 전쟁 기록 사진, 포토저널리즘, 소비자용 필름 현상, 거리 사진, 즉석사진, 스마트폰 사진, 이미지 플랫폼, 개인 시각 기록 문화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기술이 한 번 열어젖힌 가능성은 한 가지 시장으로 끝나지 않고, 연쇄적으로 새로운 시장들을 생성했다.
Kodak Brownie가 아마추어 사진 시장을 열었고, Leica가 거리 사진을 촉진했으며, Polaroid는 훗날 스마트폰 카메라의 즉시성 논리를 앞당겨 보여줬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스마트폰도 사진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십억 명을 “사진가”로 만들고, 이미지 배포 플랫폼과 새로운 미학과 직업을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서 Pete Flint가 강조하는 메커니즘은 단순합니다. 근본 기술이 가능성을 바꾸면, 사람들이 시도하는 것이 바뀌고, 그러면 새로운 시장이 생긴다.
“우리는 지금 AI의 daguerreotype moment에 있다.” 즉 공포는 현실적이고, 일부 대체와 충격도 분명 있으며, 그 과정은 실제로 많은 사람에게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런 순간은 대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기존 기술과 직업의 소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더 큰 영토가 열리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무조건 낙관론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panic is real and displacement is painful”라고 인정합니다. 다만 그 고통의 순간만 보고 전체 미래를 축소해서 해석하면, 창업가는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AI의 의미는 숙련을 빼앗는 것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숙련 위에서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영역을 열어주는 것에 더 크게 있다는 것입니다.
숙련의 시대가 저물고, 표현의 시대가 온다
앞으로 중요한 건 craft → taste → expression 순으로 이동할 것
“숙련된 장인정신(craftsmanship)”의 가치가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코딩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진입장벽을 가졌지만, 이제는 많은 사용자가 오랜 수련 없이도 꽤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음 희소성으로 taste 를 말합니다. “이제 중요한 건 취향과 안목이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는 taste조차 오래 희소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taste는 본질적으로 과거를 바라봅니다. 즉 무엇이 잘 먹혔고 무엇이 아름다웠는지, 과거의 패턴을 압축해 판단하는 능력인데, 이런 건 결국 AI가 학습 가능한 신호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taste 다음의 진짜 희소성을 expression으로 둡니다. expression은 뒤를 보는 게 아니라 앞으로를 봅니다.
과거에 검증된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무엇이 아직 없지만 있어야 하는가”, “내가 세상에 어떤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는가”를 담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AI는 taste를 점점 더 잘 흉내 낼 수 있어도, 정말 자기만의 관점에서 무언가를 밀어붙이는 표현은 인간에게 더 오래 남는다는 주장입니다.
피카소 사례: 기술을 버린 게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표현으로 넘어갔다
피카소가 처음부터 추상적 실험을 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뛰어난 사실주의적 화가였습니다.
1907년의 Les Demoiselles d’Avignon는 그 상징적 사례입니다. 당시엔 충격적이고 불쾌하다는 반응이 많았고, 심지어 동시대 예술가들조차 강한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현대미술사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읽힙니다. Pete Flint는 여기서 중요한 건 피카소가 skill을 버린 게 아니라, representation보다 expression을 택했다는 점이라고 말합니다. 즉 있는 것을 잘 묘사하는 것보다, 자기 내부의 세계와 새로운 형식을 밀어넣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AI가 이제 “skill entry fee”를 내준다. 즉 기술적 숙련은 더 이상 희소성의 핵심이 아니다. 그러면 다음 승부는 “누가 더 잘 만든다”가 아니라, “누가 더 새롭게 본다”, “누가 더 강한 관점을 밀어넣는다”가 됩니다. Pete Flint는 미래의 승자는 “자동화된 것이 가능한지”에 흥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동화를 너무 당연한 전제(table stakes)로 보고 그 위에 완전히 다른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Bowie 인용: “Never play to the gallery”
글의 마지막 철학적 중심축은 David Bowie 인용입니다. Bowie는 “Never play to the gallery”, 즉 남의 기대나 박수에 맞춰 안전한 창작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지금 창업가에게 필요한 태도는
숙련이 싸지는 걸 방어적으로 슬퍼하는 장인의 자세도 아니고
이미 검증된 취향만 지키려는 평론가의 자세도 아니며
새 도구를 써서 자기 관점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예술가의 자신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Bowie의 또 다른 구절, “항상 자신이 감당 가능하다고 느끼는 것보다 조금 더 깊은 물로 들어가라”
Sasha Stiles 사례: 인간과 기계가 함께 만드는 새로운 표현
Sasha Stiles의 사례를 들면서, 이미 예술가들이 AI를 단순 자동화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표현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MoMA에서 진행된 작업을 예로 들며, Stiles가 자신의 글을 바탕으로 만든 alter-ego AI Technelegy가 60분마다 시를 다시 쓰는 프로젝트를 언급합니다. 이 사례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표현을 새로운 형식으로 재조합하고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